
Studio Story
밤송이가 아니었어!
기린 키로와 고슴도치 포코의 우정 이야기
- 권장 연령
- 4-7
- 낭독 시간
- 9분

1막 - 만남
아주 넓은 초원이었어요.
노란 풀잎들이 살랑살랑 흔들리고, 먼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둥실둥실 떠가고 있었어요.
그 넓은 초원 한가운데, 아기 기린 키로가 혼자 걷고 있었어요.

키로는 다른 아기 기린들보다 키가 조금 더 컸어요. 그래서 아주 먼 곳까지 볼 수 있었지요. 하지만 마음은 아주아주 작고, 겁도 많았어요.
"엄마? 엄마 어디 있어?"
키로는 긴 목을 쭉 빼고 사방을 둘러보았어요. 하지만 아무리 봐도 가족은 보이지 않았어요.
"아빠? 누나?"
대답이 없었어요. 바람 소리만 쉬이이이 하고 지나갔어요.
키로의 긴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했어요. 오늘 아침만 해도 엄마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었는데, 예쁜 나비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혼자가 되어 버린 거예요.

"괜찮아, 괜찮아. 높은 곳을 보면 분명 찾을 수 있을 거야."
키로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터벅터벅 걸었어요. 긴 목을 높이 들고, 먼 곳만 바라보면서요.
그때였어요.
뭔가를 밟았어요.
"앗!"
키로는 화들짝 놀라 발을 번쩍 들었어요. 발바닥이 따끔따끔 아팠어요.

발밑을 내려다보니, 동그랗고 갈색인 무언가가 땅 위에 있었어요. 온몸에 뾰족뾰족한 가시가 달려 있었지요.
"어? 밤송이잖아!"
키로는 고개를 갸우뚱했어요.
"아니, 이상하다. 아프리카에 밤나무가 어디 있지?"
키로가 코를 가까이 대고 밤송이를 살펴보려는 바로 그 순간!

"아이고... 나 죽네..."
밤송이에서 소리가 났어요!
키로는 너무 놀라서 뒤로 벌러덩 넘어졌어요. 긴 다리가 사방으로 쩍 벌어졌지요.
"꺄악! 밤, 밤송이가 말을 해!"
그러자 밤송이가 꿈틀꿈틀 움직이더니, 천천히 몸을 펴기 시작했어요. 동그란 몸에서 작은 코가 쏙 나오고, 조그만 발이 톡톡 튀어나왔어요.
밤송이가 아니었어요. 아기 고슴도치였어요!
아기 고슴도치는 몸을 털며 투덜투덜 말했어요.
"아이고야, 어떤 녀석이 나를 밟은 거야?"
고슴도치의 이름은 포코. 포코는 키가 아주아주 작았어요. 그래서 풀숲 사이에 있으면 정말 밤송이처럼 보였지요. 포코의 등에는 뾰족한 가시가 잔뜩 나 있었는데, 그 가시 때문에 다른 동물 친구들은 포코 곁에 잘 오지 않았어요.

"앞 좀 보고 다녀!"
키로가 아직 바닥에 앉은 채로 소리쳤어요. 발바닥이 얼얼했거든요.
그러자 포코가 하늘을 올려다보았어요. 하지만 보이는 건 기다란 다리뿐이었어요.
"난 앞을 똑바로 보고 걷고 있었거든! 그런데 갑자기 누가 나를 밟은 거라고!"
포코가 더 위를 올려다보았어요. 기다란 목이 보였어요. 그리고 더 더 더 위를 올려다보았더니, 아주 높은 곳에서 두 눈이 내려다보고 있었어요.
"어... 너 누구야? 왜 하늘에서 목소리가 나는 거야?"

"나는 하늘이 아니라 기린이야! 키로라고!"
"기린? 기린이 내 위에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네가 땅에서 밤송이처럼 있으니까 못 본 거잖아!"
"밤송이?! 나는 고슴도치야! 포코라고!"
둘은 한동안 서로를 노려보았어요. 키로는 아래를 내려다보고, 포코는 위를 올려다보면서요. 키로는 목이 아팠고, 포코도 목이 아팠어요.
서로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힘이 드는 사이. 이것이 키로와 포코의 첫 만남이었어요.
2막 - 동행과 단서 모으기
키로는 한참을 바닥에 앉아 발바닥을 호호 불었어요. 포코도 납작해진 몸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투덜거렸어요.
"진짜, 하늘에서 바위가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키로는 포코를 힐끗 보았어요. 화가 나긴 했지만, 사실 지금은 화낼 기분이 아니었어요. 키로의 눈이 금세 축 처졌어요.
"... 미안해. 내가 앞을 안 보고 걸어서."
포코는 키로의 축 처진 눈을 올려다보았어요.
"너 왜 그래? 울 것 같은 얼굴인데."
"나... 가족을 잃어버렸어."
키로는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을 말해 주었어요. 엄마와 나란히 걷다가 예쁜 나비를 따라갔다는 것, 정신을 차려 보니 혼자였다는 것, 그리고 발까지 다쳤다는 것을요.
포코는 팔짱을 끼고 들었어요.
"흠. 그래서 넌 지금 가족을 찾고 있는 거구나."
"응.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 높은 곳을 아무리 봐도 안 보여."

포코는 잠시 생각에 빠졌어요. 그러더니 포코의 작은 코가 씰룩씰룩 움직였어요.
"높은 곳만 보면 안 되지."
"응?"
"발자국. 냄새. 단서는 땅에 있거든."
포코는 코를 땅에 바짝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어요.
"기린은 몸이 크니까 발자국도 크겠지. 냄새도 남아 있을 거야."
키로의 눈이 동그래졌어요.
"너 그런 걸 찾을 수 있어?"
"당연하지. 나는 매일 땅만 보고 사는걸."
포코는 투덜거리면서도 이미 킁킁거리며 발자국을 찾고 있었어요.

"자, 이렇게 하자. 넌 높은 곳을 봐. 나는 낮은 곳을 볼게."
키로는 긴 목을 높이 들었어요. 포코는 코를 땅에 붙였어요.
하나는 하늘을 보고, 하나는 땅을 보고. 이렇게 둘의 여행이 시작되었어요.
포코가 몇 걸음을 걷더니 갑자기 멈췄어요.
"여기 봐."
키로가 긴 목을 푹 숙여 포코 쪽을 내려다보았어요. 풀밭에 커다랗고 동그란 자국이 콕 찍혀 있었어요.
"이거… 발자국이야?"
"큰 발자국이야. 너희 가족 발자국 같은데."
포코가 자국에 코를 박고 킁킁거렸어요.
"이쪽으로 갔어. 풀이 한쪽으로 누워 있어."
키로의 눈이 동그래졌어요. 자기 발밑에 이런 게 있었다니,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거든요.
"우와! 정말이다!"
"뭘 우와야. 빨리 가자."
포코가 앞장섰어요. 키로는 포코를 따라 천천히 걸었어요. 발자국이 점점 더 또렷해졌어요.
얼마나 걸었을까요. 둘이 나란히 — 아니, 키로가 한 발 떼면 포코는 다섯 발을 뛰어야 했으니까, 나란히는 아니었어요 — 걷고 있을 때였어요.
"기린! 기린 맞지?"
하늘에서 시끄러운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펄럭펄럭! 빨갛고 파랗고 초록색인 화려한 새 한 마리가 키로의 머리 위를 빙글빙글 돌았어요.
앵무새 치코였어요.
치코는 키로의 머리 위에 톡 내려앉더니 쉴 새 없이 말하기 시작했어요.
"아, 나 알아! 너 가족 찾는 거지? 기린 무리! 내가 봤어! 당연히 봤지! 나는 하늘을 날아다니니까 뭐든 다 보거든!"

키로의 눈이 반짝 빛났어요.
"정말?! 어디서 봤어?"
"큰 호수 쪽이었어! 아, 잠깐. 산 쪽이었나? 아니다, 강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기린들이 자꾸 왔다 갔다 하더라고!"
치코는 날개를 퍼덕이며 이쪽을 가리켰다가 저쪽을 가리켰다가, 또 다른 쪽을 가리켰어요.
"호수! 산! 강!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었어! 셋 중에 하나야! 아마도! 거의 확실해!"
그리고 치코는 "행운을 빌어!" 하고 외치며 펄럭펄럭 날아가 버렸어요. 온 것만큼이나 갑자기요.
키로는 멍하니 서 있었어요.
"... 호수야? 산이야? 강이야?"
포코가 한숨을 푸우 내쉬었어요.
"저 새 말, 하나도 못 믿겠어."
"그래도 뭔가 본 건 맞는 것 같아."
"세 방향을 다 갈 수는 없잖아. 셋 중에 하나만 골라야 해."
포코는 땅에 코를 박고 천천히 한 바퀴를 돌았어요. 킁킁. 킁킁킁.
산이 있는 쪽으로 코를 향했어요.
"산 쪽 풀에는 작은 발자국밖에 없어. 토끼 냄새, 들쥐 냄새."
강이 있는 쪽으로 코를 향했어요.
"강 쪽은… 진흙 냄새만 진해. 큰 발 냄새는 없어."
마지막으로 호수가 있는 쪽으로 코를 향했어요. 그러더니 포코의 가시가 살짝 솟았어요.
"이쪽이야."
"왜?"
"큰 발 냄새가 길게 이어져 있어. 풀도 한쪽으로 눕혀져 있어. 아침에 우리가 본 발자국이랑 똑같은 냄새야."
키로가 포코가 가리킨 쪽으로 긴 목을 들어 멀리 바라보았어요. 끝없는 풀밭 너머로 무언가가 반짝, 하고 살짝 빛났어요.
"포코… 저 멀리 뭔가 반짝거리는 게 보여. 물 같아."
"호수일지도 몰라. 가 보자."
둘은 호수가 있을 것 같은 쪽으로 걷기 시작했어요. 포코는 계속 킁킁 냄새를 맡으며 앞장섰어요.
그러다가 포코가 딱 멈췄어요.
"... 키로."
"응?"
"앞에 뭔가 아주 큰 게 있어."
키로가 고개를 앞으로 돌렸어요. 커다란 바위가 하나 서 있었어요.
아니, 바위가 아니었어요. 바위가 움직였거든요!
"꺄악!"
키로가 뒤로 물러서자 포코도 키로의 발에 치일 뻔했어요.
"야! 조심해! 또 밟을 뻔했잖아!"
커다란 회색 몸. 뭉툭한 뿔. 작은 눈. 코뿔소 무록이었어요.
무록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어요. 그리고 작은 눈으로 키로와 포코를 번갈아 보았어요.

무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키로는 무록의 거대한 뿔이 무서워서 다리가 또 후들후들 떨렸어요. 하지만 포코가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어요.
"안녕! 우리는 키로네 가족을 찾고 있어. 혹시 기린 무리를 본 적 있어?"
무록은 포코를 내려다보았어요. 포코의 뾰족한 가시도 보았어요.
하지만 무록은 피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코를 포코 쪽으로 가까이 가져갔어요.
포코는 깜짝 놀랐어요. 다른 동물들은 가시를 보면 항상 뒤로 물러났거든요.
"... 큰 호수."
"큰 호수?"
"기린 무리. 큰 호수 쪽에서 봤어.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어."
키로의 눈이 커졌어요.
"치코가 말한 호수가 진짜였어!"
무록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고는 다시 풀을 뜯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돌아서기 전에 포코를 한번 더 보며 말했어요.
"가시, 멋지다."
그 한마디에 포코의 가시가 살짝 눕는 것 같았어요. 포코의 볼도 약간, 아주 약간 빨개졌어요.
하지만 포코는 곧 고개를 휙 돌리며 말했어요.
"흥, 뭐. 당연히 멋지지."
키로는 포코의 빨개진 볼을 보고 살짝 웃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말했다가는 가시에 찔릴 것 같았거든요.
둘은 큰 호수를 향해 걸었어요. 해가 조금씩 기울고, 하늘이 주황빛으로 물들기 시작했어요.
호수가 가까워지자 나무들이 하나둘 나타났어요. 키 큰 나무, 작은 나무, 덩굴이 감긴 나무.
그때 키로가 갑자기 멈춰 섰어요. 긴 목을 더 높이, 더 높이 뻗었어요.
"포코! 저기 봐."
포코는 까치발을 해도 풀잎밖에 안 보였어요.
"안 보여. 뭐가 있는데?"
"저기 멀리 큰 나무 한 그루가 있어. 그런데 꼭대기에서 뭔가 흔들흔들 움직이고 있어. 꼬리 같은데?"
"꼬리?"
"응. 길고 동그랗게 말린 꼬리."
포코가 코를 들어 바람 냄새를 맡았어요.
"바나나 냄새. 누군지 알 것 같아. 가 보자."
둘은 그 나무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갔어요.

가까이 가니, 정말로 나뭇가지 위에서 누군가가 거꾸로 매달려 있었어요.
"히히히히!"
꼬리가 긴 원숭이 한 마리가 반달 모양 눈으로 히죽히죽 웃고 있었지요.
원숭이 지키키였어요.
"야야야, 너 기린이지? 가족 찾고 있지? 히히, 내가 다 알아."
키로가 깜짝 놀랐어요.
"어떻게 알았어?!"
"나는 높은 나무 위에서 뭐든 다 보거든. 히히히."
지키키는 나뭇가지를 타고 쓱쓱 올라가더니 꼭대기에서 손으로 눈을 가리며 먼 곳을 보았어요.
"보인다 보여! 기린 무리! 저기 있어!"
키로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어요.
"정말?! 어디?! 알려 줘!"
지키키가 스르르 미끄러져 내려와 키로 코앞에 얼굴을 가져다 댔어요.
"알려 줄 수 있지. 그런데 말이야..."
지키키가 찡긋 웃었어요.
"공짜는 없지, 히히."
포코가 인상을 찌푸렸어요.
"뭘 원하는 건데?"
지키키가 몸을 돌리더니 등을 쑥 내밀었어요.
"등이 가려운데 손이 안 닿아. 여기 좀 긁어 줘!"
"... 그게 조건이야?"
"응! 시원하게 긁어 주면 알려 줄게!"
포코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키로를 올려다보았어요. 키로도 어리둥절했지만, 이건 해 볼 만했어요.
키로는 기다란 혀를 쭉 내밀어 지키키의 등을 쓱쓱 긁어 주었어요.
"오오오! 왼쪽 왼쪽! 아, 거기거기! 아, 시원해!"
지키키가 온몸을 부르르 떨며 기뻐했어요.
"좋아! 약속은 약속이니까!"
지키키는 다시 나무 꼭대기로 쓱 올라가 한쪽을 가리켰어요.
"호수 건너편에 아카시아 나무가 세 그루 있어. 그 옆에 기린 무리가 있어! 분명해!"

키로의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 맺혔어요.
"정말? 정말 거기에 있어?"
"내 눈은 안 속여! 빨리 가 봐!"
키로는 호수 건너편을 바라보았어요. 멀리, 아주 멀리, 나무 세 그루의 그림자가 보이는 것 같았어요.
"포코! 찾았어! 드디어 찾았어!"
포코도 올려다보며 작게 웃었어요. 입은 삐죽거렸지만, 눈은 분명히 웃고 있었어요.
"흥. 아직 도착한 거 아니야. 빨리 가자."
둘은 호수를 향해 다시 걷기 시작했어요. 이번에는 아까보다 훨씬 빠른 걸음으로요.

3막 - 위기
호수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어요. 물 냄새가 바람에 실려 왔어요.
키로의 발걸음이 빨라졌어요.
"조금만 더 가면 돼! 아카시아 나무 세 그루만 찾으면!"
하지만 포코가 갑자기 멈춰 섰어요. 포코의 가시가 쭈뼛 서기 시작했어요.
"키로. 잠깐."
"왜?"
"뒤에서 뭔가 따라오고 있어."
키로가 뒤를 돌아보았어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요. 풀잎만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지요.
"아무것도 없는데?"
"없긴. 풀 냄새 사이에 다른 냄새가 섞여 있어. 고기를 먹는 동물 냄새야."
포코의 코는 틀린 적이 없었어요. 키로의 다리가 다시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했어요.
"어, 어떻게 하지?"
"일단 걸어. 뒤를 보지 마. 천천히."
둘은 아무렇지 않은 척 걸었어요. 하지만 키로의 심장은 쿵쿵쿵쿵 아주 크게 뛰었어요.

풀숲에서 바스락 소리가 났어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어요.
키로가 살짝 고개를 돌렸어요. 높은 풀 사이로 무언가가 잠깐 보였어요.
황갈색 갈기. 날카로운 눈.
사자였어요. 사보였어요.
"포, 포코..."
"알아. 나도 알아."
사보는 풀숲에 몸을 낮추고,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어요. 사냥감을 노리는 눈이었어요. 그리고 그 눈은 키로를 보고 있었어요.
"키로! 나를 등에 태워!"
포코가 소리쳤어요. 키로는 얼른 고개를 숙여 포코를 등 위로 올렸어요. 포코는 키로의 등 위에서 사보를 노려보았어요.
"좋아. 이제 뛰어!"
키로가 달리기 시작했어요. 긴 다리로 풀밭을 힘껏 뛰었어요.
하지만 사보도 빨랐어요. 아니, 사보가 더 빨랐어요.
점점 가까워졌어요. 점점. 점점.
"키로, 이러다간 잡혀! 멈춰!"
"멈추라고?! 지금?!"
"내 말 들어! 작전이 있어!"
키로가 급하게 멈춰 서자 포코가 재빨리 말했어요.
"내가 네 꼬리에 매달릴 거야."
"꼬리?!"
"사보가 달려들면, 내가 신호를 줄게. 그때 꼬리를 있는 힘껏 휘둘러."
"그, 그게 무슨..."
"내 가시, 기억나지?"
키로는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어요. 포코를 밟았을 때 발바닥이 얼마나 아팠는지.
"... 기억나."
"그때 그 아픔을 사보한테 선물하는 거야."
포코는 쏜살같이 키로의 등을 타고 내려가 꼬리 끝을 꼭 붙잡았어요. 동그랗게 몸을 웅크리니, 꼬리 끝에 가시 달린 공이 매달린 것 같았어요.
사보가 멈춰 서서 키로를 노려보았어요.
"꼬마 기린, 도망치다 지쳤구나."

사보가 낮게 으르렁거렸어요. 뒷다리에 힘을 모았어요. 그리고 뛰어올랐어요!
"지금이야!!!"
포코가 소리쳤어요.
키로는 눈을 꽉 감았어요. 그리고 꼬리를 있는 힘껏 휘둘렀어요!
휘이이이이잉! 퍽!
"으아아아악!!!"
사보의 코에 포코의 가시가 가득 박혔어요. 사보는 앞발로 코를 감싸 쥐고 데굴데굴 굴렀어요.
"앜! 아파! 뭐야 이거! 아야야야!"
사보는 코를 부여잡고 눈물을 글썽이며 풀숲 속으로 도망쳤어요. 그 커다란 몸이 엉엉 울면서 멀어져 갔어요.
둘은 한동안 서 있었어요. 숨이 헐떡헐떡 가빴어요.
키로가 먼저 입을 열었어요.
"포코."
"... 뭐."
"네 가시, 진짜 대단해."
포코는 키로의 꼬리에서 내려와 몸의 먼지를 탈탈 털었어요.

"처음 만났을 때는, 나한테 앞 좀 보고 다니라고 했었잖아."
키로가 머쓱하게 웃었어요.
"그때는 몰랐어. 네 가시가 이렇게 멋진 건지."
포코는 고개를 돌렸어요. 하지만 가시 사이로 살짝 보이는 귀가 빨개져 있었어요.
"... 흥. 빨리 가자. 가족이 기다리고 있잖아."
키로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리고 이번에는 고개를 숙여서 포코를 바라보았어요.
먼 곳이 아니라, 바로 발밑에 있는 친구를요.
"고마워, 포코."
포코의 가시가 살짝 누웠어요.
"... 뭐, 별거 아니야."
둘은 다시 호수를 향해 걷기 시작했어요. 이번에는 나란히. 키로가 걸음을 천천히 맞춰 주었거든요.

4막 - 재회와 이별
호수를 돌아 건너편에 다다랐을 때, 해가 거의 다 지고 있었어요.
하늘이 주황빛에서 보라빛으로 바뀌고 있었어요.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어요.
키로가 멈춰 섰어요.
저 멀리, 아카시아 나무 세 그루가 보였어요. 그리고 그 아래에, 기린들이 있었어요.
키로의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어요.
"엄마..."
엄마 기린이 보였어요. 긴 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어요. 아빠 기린도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누나 기린은 풀숲 사이를 두리번두리번 살피고 있었지요.
가족 모두가 돌아다니고 있었어요.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요.
치코가 했던 말이 떠올랐어요. 기린들이 자꾸 왔다 갔다 하더라고.
무록이 했던 말도 떠올랐어요.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어.
포코가 처음 맡았던 큰 발 냄새, 풀이 한쪽으로 누운 그 길. 전부 이 가족이 만들어 놓은 것이었어요.

그게 이거였어요. 가족도 키로를 찾고 있었던 거예요. 하루 종일.
키로의 큰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어요.
"엄마!!!"
키로가 소리쳤어요. 있는 힘껏요.
엄마 기린이 고개를 돌렸어요. 그리고 키로를 보았어요.
엄마 기린이 달려왔어요. 키로도 달려갔어요. 긴 다리로, 있는 힘껏, 엉금엉금이 아니라 진짜 달리기로요.
쿵.
엄마의 긴 목이 키로의 목을 감싸 안았어요. 아빠가 왔어요. 누나도 왔어요. 기린 가족이 키로를 빙 둘러쌌어요.
아무 말이 없었어요. 그냥 서로의 목을 부비고, 냄새를 맡고, 옆에 있다는 것을 확인했어요.
키로는 한참을 울었어요.
얼마나 지났을까요. 키로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어요.
포코가 거기 있었어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주 작은 몸으로 서 있었어요. 키로의 가족을 바라보고 있었지요. 입은 언제나처럼 삐죽했지만, 눈은 조금 다른 것 같았어요.
키로가 포코에게 걸어갔어요. 이번에도 고개를 숙여서 포코를 바라보았어요.
"엄마, 소개할 친구가 있어."
키로가 엄마 기린을 포코 앞으로 데려왔어요.
"이 친구는 포코야. 내가 길을 잃었을 때 같이 걸어 주고, 냄새로 길을 찾아 주고, 무서운 사자한테서 나를 지켜 준 친구야."
엄마 기린이 긴 목을 천천히 숙여 포코를 바라보았어요. 아빠도, 누나도 고개를 숙였어요. 기린 가족 모두가 포코를 내려다보았어요.
포코는 갑자기 그 많은 눈이 자기를 보고 있으니까 당황해서 가시가 쭈뼛 섰어요.
"어, 뭐... 별거 안 했는데..."
엄마 기린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어요.
"고마워, 포코. 우리 키로를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
아빠 기린이 고개를 끄덕였어요.

"용감한 친구구나."
누나 기린도 코를 포코 쪽으로 살짝 내밀었어요. 포코의 가시를 보고도 아무도 피하지 않았어요. 무록처럼요.
포코의 가시가 스르르 누웠어요. 볼이 빨개졌어요. 이번에는 숨길 수 없을 만큼요.
"흥. 그냥... 같이 걸은 것뿐이야."
그때 키로가 아카시아 나무 앞으로 걸어갔어요. 긴 목을 쭉쭉 뻗어 아주 높은 가지에 달린 열매를 톡 따냈어요. 노랗고 동그란, 달콤한 냄새가 나는 열매였어요.
키로가 고개를 숙여 포코 앞에 열매를 톡 내려놓았어요.
"이건 뭐야?"
"아카시아 열매. 높은 데 달려 있어서 기린만 딸 수 있어."
"... 그래서?"
"너는 내가 못하는 걸 해줬잖아. 냄새 맡기, 길 찾기, 같이 걷기.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걸 주고 싶었어."
포코는 열매를 내려다보았어요. 작은 코가 씰룩거렸어요. 한 입 베어 물었어요.
"..."
"맛있어?"
"... 뭐, 먹을 만해."
포코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어요. 아주 살짝요.
열매를 다 먹은 포코가 몸을 돌렸어요. 작은 등에 가시가 빼곡했어요.
"잘 지내. 다음에는 앞 좀 보고 다녀, 기린아."
포코가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어요.
키로는 포코의 작은 뒷모습을 바라보았어요. 동그랗고, 뾰족하고, 아주아주 작은 뒷모습이었어요.
"포코!"
키로가 소리쳤어요.

포코가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어요.
"또 볼 수 있지?"
포코는 잠깐 가만히 있었어요.
그러더니 작게, 아주 작게 웃었어요. 포코가 웃는 걸 키로는 처음 보았어요.
"내가 밤송이처럼 보여도, 잘 찾아봐."
포코가 손을 작게 흔들었어요. 그리고 풀숲 속으로 사라졌어요.
키로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어요.

며칠이 지났어요.
키로는 다시 가족과 함께 초원을 걷고 있었어요. 엄마 옆에서 나란히, 이번에는 나비를 따라가지 않고요.
그런데 키로에게 새로운 습관이 하나 생겼어요.
걸을 때마다 가끔씩 고개를 숙이는 거예요. 긴 목을 구부려 풀밭을 살펴보는 거예요.
엄마가 물었어요.
"키로야, 뭘 보는 거니?"
키로가 웃으며 말했어요.
"밤송이."
엄마는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키로는 그냥 웃었어요.
발밑에도 소중한 친구가 있을 수 있으니까요.
- 끝 -
